남한산성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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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5-0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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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이 남한산성의 성벽 중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이라 들었다. 그후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었던 시기에 대대적으로 개수한 것이 지금의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모습이다. 15만 9천 8백 5십 9평의 규모를 자랑한다. 백제(百濟) 온조왕이 이미 산성(山城)을 쌓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이라 불렀다는 기사가 『고려사(高麗史)』와 『세종실록』에 남아있다.
기행문 남한산성
기행문 남한산성 / (기행문)
남한산성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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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두었다. 행궁(行宮)은 73칸 하궐 154칸 총 227칸이 있었다. 원총안(遠銃眼)은 성벽에서 멀리 떨어진 적군(敵軍), 근총안(近銃眼)은 가까운 곳의 적군(敵軍)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복원도 좋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또 한번의 훼손은 너무하지 않나 생각했다. 비록 안개가 있어 시계가 나빴지만 전경이 확 들어왔다. 지붕은 초익공계 양식의 팔작지붕이다. 그 후 통일신라 고려(高麗)․조선시대(朝鮮時代)를 거쳐 여러 번 개축되었다. 성벽을 따라 오르막 내리막을 걷다가 성남의 시가지를 보았다. 남문의 본래 이름은 지화문이다. 개인적인 소견이기는 하지만 아마 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복원도 70년대 박정희 정권이 하였던 국방유적지 복원사업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성벽을 따라 우리는 돌기 처음 했다. 행궁(行宮) 이외에도 80개의 우물 45개의 샘물 광주읍(廣州邑)의 행정처〔治所〕도 산성 안으로 옮기게 되었다. 사진으로 남문의 모습을 담으려고 했는데 공사중이여서 멋있는 모습을 찍지 못해 아쉬웠다.
등이 제대로 있기 하였지만 다만 원래부터 남아 있던 것이 아니라 개․보수를 한 것이다. 우리는 남문을 처음 으로 서문 북문 쪽으로 도는 코스를 선택했다. 석축(石築)을 올려 쌓은 성은 둘레가 약 8㎞에 달하고 외성과 여러 돈대를 합치면 총12㎞에 이른다. 더구나 여장의 윗 부분과 각 여장과의 사이에는 어떤 생각으로 복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시멘트로 발라 버린 것이었다. 지화문은 중앙에는 홍예문을 두고 그 좌측과 우측으로는 막돌쌓기로 자연석을 평줄운에 맞춰 쌓았다. 남문에 도착하니 현재 남문은 개․보수 공사를 하는지 철골에 남문이 둘러 쌓여 있었다.
다. 안개가 껴서 그런지 산 위에서 산하를 굽어보는데 멀리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가서 보니 물론 여장(女墻) 성벽 위의 수비군이 자신의 몸을 숨기면서 바깥의 적군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성안의 시설로는 동서남북 각각의 대문(大門)과 문루(門樓), 8개의 암문(暗門)을 내었고 동서남북의 장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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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간단히 알아보면 조선시대(朝鮮時代)가 아닌 훨씬 전부터 국방(國防)의 요새(要塞)로 성곽(城郭)으로 사용되었다.
설명
그리고 총안(銃眼) 총안(銃眼)에는 두 가지 원총안(遠銃眼) 근총안(近銃眼)이 있다. 그리고 현재는 남아있지는 않지만 성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와 창고 행궁(行宮) 행궁(行宮)은 유사시 왕이 거처할 것을 대비하여 건립되었다.